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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펌) 이번 한국인 2명의 죽음을 대하면서.......

작성일 2005.08.18 12:44 | 조회 4,936 | 푸른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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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이번 한국인 2명의 죽음을 대하면서.......


매부 처남 사이인 이광태씨와 김광구씨가 다툼을 벌이다 미국 경찰이 쏜 총에, 칼을 들고 있던 이광태씨는 그 자리에서 즉사를 당하고 피신해 있던 김광구씨는 유탄을 맞아 죽는 사건이 우리가 사는 베이 지역에서 발생했다. 경찰은 정당 방위를 주장하는 반면, 김광구씨 부인 김지영씨는 오빠 이광태씨가 대항도 하지 않았는데도 경찰이 총을 쏘았다며 과잉 대응이라고 법에 호소할 것이라고 한다. 최종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어쨌든 같은 한국인으로서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한국에서 관광으로 미국에 온 이광태씨로서는 설마 경찰이 자신에게 총을 쏴 죽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경찰이 총을 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경찰이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총을 쏴 상대방을 죽이는 사례를 미국에 있는 우리는 언론을 통해 종종 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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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분명 문화적 차이가 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한국인이 미국에 왔다면 기초적인 미국법 혹은 미국의 문화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솔직히, 관광차 들어온 한국인이 어떻게 이런 것들을 알 수 있겠는가? 베이비를 자동차 안에 두고 마켓에 들러 물건을 잠시 사러 간 동안 누군가가 신고를 하면, 그는 당장 경찰에 체포되어 가고 심할 경우에는 살인... 어쩌고 하는 죄로 오랫동안 철창 생활을 면치 못하게 될 수 있는 곳이 미국이다.

과거 미국에서 한 한국 여성이 법정에서 ‘It's my fault'라고 하여 자기 자녀를 죽인 사실을 인정한 것이라고 하여 살인죄로 판결받은 사건은 많은 한국인들에게도 기억하고 있을 만큼 유명하다.(본인은 당시 미국에 있지 않아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에서는 그랬다.) 그 누군가에 의해 자식을 죽게 한 것이라도 결국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은 자신이라는 생각으로 부모로서 ’내 탓이다‘라고 한 것인데, 이 말을 미국인들은 ’내가 직접 살인한 것이다‘는 유죄 인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한국인의 정서로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칭찬받을 수 있는 말이 미국에서는 전혀 그 반대가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한때 천주교가 주도하여 ‘내 탓이요’하는 운동이 한창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내 탓이요>라고 하는 예쁘장하게 도안된 작은 스티커가 시내 곳곳에 붙어 있었고 많은 차량에도 이 스티커가 붙어 있었던 적이 있다. 미국에서는, 아무리 어떤 종교 단체가 주도했다고 할지라도, 이런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다. 미국에서는 내 탓과 네 탓을 아주 분명히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일을 겪을 수 있다.

참고 : <내 탓이요> 이미지 - 클릭!
http://blogfiles.naver.net/data5/2005/2/13/295/%B3%BB%C5%BF%C0%CC%BF%E4-jufotao.gif

어떤 의미로 미국은 무서운 나라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산지 오래 된 사람도 여전히 한국인으로서의 문화적 정서를 갖고 있기 마련인데, 자칫 미국 법이나 문화를 잘 알지 못해 큰 낭패나 화를 당할 수 있다. 함부로 ‘너, 죽고 싶어?, 죽여 버릴거야’ 등 한국에서 익숙했던 말을 한마디 했다간 살인... 어쩌고 하는 죄로 곧바로 철창 신세를 지게 된다. 실제로 바로 얼마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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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을 두고 ‘인종 차별’이라고 항의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과연 미국인이었다면 경찰이 이렇게 총을 쏘아 죽이기까지 했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주장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인종 차별이라는 용어를 선택하여 말하지 못한다. 우리 한국인은 어떠한가? 동남아시아에서 한국에 건너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 한국인들의 행위는, 백인들의 다른 인종에 대한 그것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듯해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국에 들어와 있는 동남아시아인들에 대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인권 유린을 하는 경우가 많고 또 이제 돈 좀 가졌다고 해서 동남아시아에 관광을 나가 벌이는 여러 추태들은 정말 가관도 아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했던가? 물론 누구나 같은 인종이나 동족에 대해 더 우호적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덜 우호적일 수 있다. 아무래도 백인이 백인에게, 한국인이 한국인에게 더 우호적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같은 인종이나 동족에 대해 우호적이라기 보다는 상대방이 강대국 사람이냐 약소국 사람이냐에 따라 태도가 달라진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이런 아름답지 못한 면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서양인들에게 대하는 태도는 극진하다. 차 안에서 젊은이들이 노인들에게는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도 서양인들에게는 기꺼이 그렇게 한다. 지금은 반미 정서로 인해 이런 현상이 감소되었기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여전하다. 이와 반대로 동남아 사람들, 아프리카계 사람들에게는 매우 냉소적이고 냉혈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얼굴색이 아프리카계라고 할지라도 미국에서 건너온 사람임을 알게 되면 태도가 갑자기 돌변한다. 그 즉시로 우대해 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성이 작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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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베이 지역 금문교에는 “이 나라는 어떤 특정한 인종을 위한 나라가 아니고 보다 나은 삶을 찾아온 모든 이의 것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어떤 글에서 본 적이 있다. 금문교를 차로 지나가 보긴 했어도 이 문구가 있는지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현실에서는 이 문구대로 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서 단지 인종 차별로만 몰아 부칠 수 없다. 우리가 백인들부터 정알 어떤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단순히 피부색이 황인종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무언가 열등해 보이기 때문이다.

황인종이라고 하더라도 정말로 그들에게 내세울만한 당당한 인종 혹은 민족으로 평가받는다면 과연 그들이 그렇게 쉽게 차별을 행할 것인가? 결코 그렇지 못하다. 아니, 그렇게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정말로 어떤 차별을 받고 있다면 그 차별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 본질의 해결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이 홈페이지에 이번 두 분의 죽음 사건에 대해 여러 번 글이 올라오고 또 댓글로 난상토론을 하고 있다. ‘함께 애도하자’는 글, 그리고 ‘죽을 짓을 했기 때문에 죽었다, 왜 미국에서 한국에서처럼 행패를 부리려 했는가’라는 글의 양 극단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서로 욕설을 섞은 인신 공격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사자(死者)는 이제 침묵만을 유지하고 있는데 우리끼리 싸우고 있다.

하지만 욕설성 상호 토론이 유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하며 그래서 우리 한국인은 본질적으로 업그레이드되어야 할 것이며, 그래서 이런 방향으로 성숙한 토론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본질적 문제 해결에 대한 노력이 없이는, 장차 100년 후에도 우리 후손들에게 이번과 같은 사건이 발생할 수 있고 그 때도 그들 사이에 지금과 근사한 욕설성 토론이 재현될 것이다. 우리의 후손은 그때에도 여전히 약소국민으로 살아야 하며 그래서 서러움을 당해야 하며 또 인종 차별이다 아니다로 공방해야 하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이 아니라 장차며, 1세대가 아니라 2세 혹은 그 이후다. 우리는 길게 보고, 먼 미래에는 이런 일이 있지 않게 우리 한국인이 스스로가 탄탄하고도 올바른 자리매김이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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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과 서양은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다. 금성에 사는 외계인과 화성에 사는 외계인만큼은 아닐지라도(물론 본인은 외계인의 존재는 인정치 않는다), 동양인과 서양인은 의식 구조와 문화에 있어 확연한 차별성이 있다. 같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어쩌면 ‘서양인들은 우리와 다르다’라고 전제하고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그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같은 사람의 모양이니까, 혹은 오랫동안 그들과 더불어 지냈으니까, 나도 그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가지면 이는 오해다.

‘빙산의 일각’이란 말이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빙하는 전체 얼음 덩어리의 1/10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타이타닉호는 물 위에 떠 있는 빙하만 보고 얕보았다가 물밑의 얼음 덩어리에 걸려 당한 것이었다. 동양인이 서양인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전부를 아는 것처럼 여기면 안되는 것이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우리 동양인이 웃는 것과 미국인이 웃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이 웃는다고 함께 얼씨구나 하면서 웃을 일만은 아니다. 물론 웃어야 할 분위기에서 웃지 않고 무표정으로 있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단순하여 웃으면 그냥 웃는 것이지만, 미국인들은 많은 경우에 그 웃음 뒤에는 많은 복합적인 것들이 들어 있다. 예컨대, 교통 사고가 나서 상대방 미국인이 미소를 짓는다고 해서 ‘아 문제가 잘 해결되겠구나’ 하면 오산이다. 그들은 웃으면서도 우리 한국인이 짜증이 날 만큼의 일을 조금의 에누리도 없이 냉정하게 행한다. 우리 한국인에게는 이 ‘웃음과 냉정’의 이중성이 아직은 낯설지만, 그들에겐 너무도 익숙하다.

대체적으로, 동양은 감성적, 정감적 문화를, 서양은 이성적, 논리적 문화를 형성해 왔다. 이번에 오빠와 남편을 한꺼번에 잃은 김지영씨는 여러번 절규하며 실신하곤 했는데 이런 모습을 이곳 미국인들에게는 거의 찾아 보기 힘들다. 미국인들은 대부분 우리가 보기에는 ‘냉혈인’이라고 할만큼 감정 표현이 무척 절제되어 있다. 화도, 울음도 크게 내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할 일은 다 한다. 이에 비해 우리는 화도, 울음도 크게 내며, 나중에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지도 못한다. 물론 서양인의 이런 무감정을 칭찬하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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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 정감적이라 함은 가슴(Heart)을, 이성적, 논리적이라 함은 머리(Brain)를 말한다. 동양 문화는 가슴 문화고 서양 문화는 머리 문화다. 흔히, ‘따뜻한 가슴과 냉철한 머리를 가져야 한다’라고 말한다. 가슴은 감성을, 머리는 이성을 대변한다. 사람은 확실히 감성과 이성 양면성을 가져야 한다. 이성이 없는 감성도, 감성이 없는 이성도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느냐를 따진다면, 감성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을 열게 했던, 철학자 푸코는 <광기의 역사> 책에서 중세가 끝나고 근세가 시작되면서 인간이 이성을 최고의 권위로 올려놓았지만 그 이성은 이성과 반대되는 광기의 일만 해놓았다고 비판했다. 이성이란 이름으로 비이성적인 결과를 가져온 서구인들의 모순된 사실을 그는 역사적 근거를 대면서 길게 설명하였다.

과거 18세기에 서구에서 꽃을 피웠던 계몽주의는 지식으로 인간의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하면 곧바로 지상 낙원이 도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처럼 지식에 의해 계몽되었다는 인간들이 해 놓은 일이라고는 지상 낙원은 커녕 제 1,2차 세계대전 등을 통해 인간의 잔인스런 준지옥과 같은 모습만 드러내도록 하였다.

이러한 전쟁이 끝난 후 서구인들은 이성 중심의 근대에 환멸을 느끼고는 탈근대, 즉 포스트모더니즘을 내놓았다. 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감성을 중시한다. 그리고 EQ(감성지수)라는 말을 가장 먼저 사용한 대니얼 골먼같은 교육심리학자는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IQ(지능 지수)보다는 EQ(감성지수)가 뛰어났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감성이 전제되지 않는 이성은 매우 위험하게 된다. 서양의 사람들과 문화가 그러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서양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창하며 감성 운운 하면서도 여전히 이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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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서구인들이 이성, 지성 중심의 서구 세계에 대해 한계성 내지는 환멸을 느끼고는 스스로 감성 중심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스스로 내세워 보았지만 이것으로도 역부족임을 느끼고는, 그 대안으로 동양 철학 혹은 종교를 기웃거리거나 여기서 안식을 얻고 있다. 이성, 지성 중심의 서구는 지금 한계에 도달해 있다.

과학계에 있어서도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가 발표된 지 벌써 오래 되었다. 하이젠베르그는 뉴튼, 아인슈타인을 잇는 물리학계의 거두라고 할 수 있다. 불확정성 원리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물체에 대한 그 무엇도 객관적으로 확정지어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가장 확정적인 것의 추구를 제일 목표로 하는 과학 스스로 그 마지막 추구의 결과가 확정지어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니!

하이젠베르그는 원자 이하의 세계를 다루는 양자역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원자마저 물질을 쪼개고 쪼개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극미한 소립자(素粒子) 세계로 들어가면 결국 비물질, 즉 에너지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도대체 이런 일이 가능하긴 한가! 그런데 이미 아인슈타인은 E=MC2 공식을 통해 질량(M)이 곧 에너지(E)임을 밝혀 놓았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물체가 곧 비물질인 에너지와 동일한 것이며, 이 물질을 쪼개어 나가면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에 이르게 된다.

빛도 물질인 입자이면서 동시에 비물질인 파동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빛마저 객관적으로 확정되지 않고 관찰자인 인간이 개입되어야만 빛이 존재한다, 즉 빛과 인간의 상호관계에서만 빛의 존재가 거론될 수 있다는 등의 범인들로서는 알아 듣기 말을 한다. 과학자가, 과학적 이성으로써 이성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동양의 철학이나 종교에 기웃거리는 이유는 이곳에서는 이미 세상의 공(空), 허(虛), 만물의 상호 관계 등의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이 지식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니 결국 동양이 발견되는 것이다.

많은 동양인이 서양에 유학한다. 그런데 이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결코 서양이 유학 여정의 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가 진정으로 학문을 하는 자라면 결국 동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몸은 아니더라도 학문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동양은 서양보다 오히려 심원하다. 이성과 지성의 세계 너머의 세계를 제시해 주고 있다.

서양의 교수들 가운데는 유학생에게 “왜 자신은 동양을 공부하고 싶은데 그대들은 동양에서 왔으면서도 동양에 대해서는 모르고 서양에 대해서만 배우려 하는가?”하고 반문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서양의 지식과 문물을 조금 익혔다고 해서 많이 알고 가진 사람처럼 생각하지 말자.

서양의 이성, 지성 중심의 문명은 이미 피곤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대안을 동양에서 발견하고 놀라워한다. 서양의 대안이 동양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동양인은 거꾸로 서양만을 전부로 여기며 여기서 대안을 찾으려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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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은 그들 스스로 분명 ‘백인우월주의’ 사고를 갖고 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유태인은 이를 넘어 시온니즘 (Sionism), 즉 ‘선민(選民, 신으로부터 선택된 민족)’ 사고를 가지고 있다. 반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백인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곳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중 가장 우월한 인종은 누구일까?”라고 물어 본 적이 있는데, 대다수가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순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순서로 우수할까?

아니다. 동양의 인종이 결코 서양의 인종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동양은 우수하다. 억지춘향식으로 동양의 우수성을 꿰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한 것을 밝힐 따름이다. 동양에 속한 우리 민족은 우수하다. 왜 우수성이 있는 민족이 스스로를 비하하며, 그 우수성을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되도록 하는 것일까?

서양의 우수성에 있어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다만 마치 전적으로 서양만 우수하고 동양 그리고 우리나라는 열등한 것처럼 여겨서도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동양, 우리나라의 우수성을 재발견해야 한다.


몇 가지만 더 말하고 끝내보자.

이번에 돌아가신 분은 이곳에 와서 억척스럽게 페인트 일을 해서 번 돈으로 150만불대의 집들로 채워져 있는 더블린 단지에서 집을 하나 장만하여 살았다고 하는데, 역시 돈이 최고가 아님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 두고는 이처럼 허망하게 죽으면 어떡할 것인가? 안타깝다. 돈만을 추구하지 말자. 그 이상이 있음을 생각해 보자.

사실 이번 사건은 그렇게 흔하게 나타나는 일이 아니다. 한인 지역 언론은 피상적으로 사건을 단순한 기사성으로만 다루지 않고 이 사건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이나 태도가 무엇인지를 좀더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제시해 주었으면 한다. 상업적인 Jesus Jesus 공연 보다는 이런 일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보여야 할 것이다.

우리 한민족은 본래 정(情)의 민족이었다. 어쩌다가 서양의 비정(非情)한 문화에 다소 길들여져 있는데, 다시 정(情)의 민족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남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며, 남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여길 줄 아는 성숙한 민족성을 재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댓글에서 이들의 죽음에 대해 냉혹한 말을 하는 분들이 몇몇 계신데 그렇게 하면 안되며 오히려 함께 애도해 주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여기에 사는 사람도 아니고 한국에서 관광을 와서는 미국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일이 왜 슬픈 일이 아닌가?

두 분의 죽음은 분명 슬픈 일이다. 하지만 감상에만 젖어 있을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한국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파악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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