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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를 안고 -마종기

작성일 2008.11.12 14:21 | 조회 1,572 | di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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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를 안고

마종기

눈 오는 오후에 두 달 된 손녀를 안고
어두워가는 창밖을 넋 놓은 채 보고 있다.
세상은 갈수록 눈에 젖어서 희미한데
아기는 두 눈 뜨고 물끄러미 올려본다.

아들 집에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종일 왔다 갔다 손녀를 돌보아주는 것뿐,
책 한 줄 못 읽고 산책 잠시도 못한 채
안고 있는 손녀의 귀에 대고 중얼거린다.
엊그제는 가까웠던 친구가 갑자기 죽어서
이 할아버지는 며칠째 울적하기만 하구나.

그러나 우리의 처방은 읽고 보고 느끼는 것뿐인지
오늘은 종일토록 너를 읽고 보았고
실적 없이 환한 네 미소만 느끼고 있었구나.
그렇구나, 나는 왜 내 의미와 변멍을 찾아
한 세월 멀고 어려운 곳만 헤매 다녔을까
너를 안고 하루를 지내니 새롭게 알겠구나
한평생 사는 것이 전연 복잡한 게 아니라는 것을.

하루종일 어색하게 너를 안고 지낸 두 팔도
네 옹알이와 눈 오는 풍경이 좋은 마취제였는지
너를 방에 눕히고 나서야 온몸이 갑자기 저려온다.
서서히 꺼져가는 내 몸 위에서라도 바르게 서거라.
어느새 젖은 눈 그치고 건넛집 불빛이 따뜻하다.

- 마종기 시집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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