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화랑세기와 흉노적 성(性)풍습 (펌)

작성일 2005.09.29 11:39 | 조회 8,884 | 푸른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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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랑세기와 흉노적 성(性)풍습

신라 내물왕 이후의 김씨(金氏) 왕들이 실은 흉노계통의 기마민족 출신이라면 그들의 풍습 중에서 흉노적인 성격들이 드러나야 한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데 좋은 자료가 화랑세기(花郞世紀)(위작설(僞作說)도 있다)이다. 김대문(金大問)이 썼다고 전해지는 이 책은 1980년대에 부산에서 그 필사본이 발견된 이후 진짜냐 가짜냐로 학계의 쟁점이 되어 왔다.

이 책을 읽어보면 신라 왕족들과 귀족들의 성풍습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다. 근친 결혼뿐 아니라 아버지가 다른 남매끼리의 결혼, 작은아버지와 결혼한 경우, 왕족 여성들의 화려한 남성 편력, 그리고 형사취수(兄死娶嫂), 즉 형이 죽으면 그 처를 동생이 인수한다는 사례도 있다.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어 삼국통일의 길을 여는 김춘추(金春秋)의 아버지는 화랑세기에 따르면 김용수(金龍樹)였다. 김용수는 동생보다 먼저 죽었다. 그는 죽기 전에 동생인 용춘(龍春)에게 아내 천명공주와 아들 춘추를 맡겼다. 용춘은 형수와 형의 아들을 자신의 아내와 아들로 삼았다고 한다. 용수는 그 전에 천화공주를 아내로 맞아 살고 있었는데, 천명공주를 다시 아내로 맞게 되자 천화공주를 동생 용춘에게 주었다. 즉 용수는 동생에게 두 명의 아내를 잇따라 준 것이다. 위의 사례는 사기(史記) 등 중국의 사서(史書)가 전하고 있는 흉노의 풍습과 비슷하다.

삼국사기 내물왕조(條)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신라에서는 같은 성(姓)끼리 혼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형제의 자식이나 고모, 이모, 사촌 자매까지 아내로 맞았으니, 비록 외국으로서 각기 풍속이 다를지라도 중국의 예속으로써 이를 따진다면 큰 잘못이다>

삼국유사에는 7세기 문무왕 시절 지방관리가 경주에서 찾아온 손님에게 아내를 동침하도록 바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풍습도 북방 유목민들 사이에 전해 오는 것이다. 화랑세기에는 진평왕 때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양도(男)와 보량(女)이란 남매 사이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양도는 어른들이 남매 간의 결혼을 권하자 이렇게 말한다.

『저는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나 사람들이 나무랄까 걱정입니다. 제가 오랑캐의 풍속을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 모두 좋아할 것이지만 중국의 예를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가 모두 원망할 것입니다. 저는 오랑캐가 되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아들 양도를 감싸안으면서 『참으로 나의 아들이다.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 어찌 중국의 道로써 하겠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김영사, 이종욱의 「화랑세기로 본 신라 이야기」에서). 6세기 당시 흉노계 신라 귀족사회에도 중국의 유교적인 가치관이 들어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기록이다. 아들 양도는 『나는 오랑캐가 되겠다』고 선언하는데 이는 『나는 흉노의 아들이니 야만의 법속을 따르겠다』는 자아(自我)의 선언이다.

중국으로부터 밀려오는 유교적․보편적 가치관에 대응한 신라적인 주체선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신라 사회가 흉노적인 특수성과 중국적인 보편성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위대성은 특수성과 보편성을 종합하여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승화시킨 점이다. 신라 왕족이 대당(對唐) 결전을 선택하여 신라의 독자성을 확보한 정신적 배경에는 『중국은 중국 것이 있고 우리 신라에는 우리의 가치가 있다』는 자주성과 자존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 자주성과 자존심의 근원에는 『우리는 漢을 속국으로 삼았던 흉노의 후손이다』는 정체성 의식이 깔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 몸속에 흐르는 흉노의 피 - 11
훈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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